道)라는 개념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나는 도라는 개념의 - 역설적으로 노자는 이것이 말로 표현될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것은 아마 개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노자의 말이고, 노자의 말을 이해하는 나는 역시 개념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 주요한 의미 하나를 <전체적 전망>이라고 이해한다. 만약 완전한, 혹은 절대적 의미에서 전체적 전망을 가졌다면 그야 말로 도인(道人)일 것이고, 장자가 이상적 인간 유형으로 그려낸 지인(至人)일 것이다. 나는 인간 인식의 유한성을 믿기에 이런 도인이나 지인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이상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비록 전체적 전망을 적극적으로 해명할 수 없다고 해도 부정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 따라서 전체적 전망을 갖는다는 것의 부정적 의미는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어떤 고정적 생각, 혹은 자연적 생각이 틀릴 가능성이 있거나 내가 그것에 대해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완고한 생각이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아파트 위층에서 매우 시끄럽게 뛴다. 위층으로 올라가 대판 싸우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스스로 알아서 아이들이 뛰지 않도록 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도 않다. 이 쿵쿵거리는 소리에 거의 신경 쇄약에 걸릴 지경이다. 따라서 모든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으며, 집에서는 언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일까 전전긍긍이다. 왜 내가 이래야 하는가? 갑자기 흉기라도 들고 위층에 올라가 다 때려 부수고 싶다. 그런데 멀리 산에 올라가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동네를 본다. 진짜 성냥갑 같다. 거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어떤 의미에서 작은 일이며 사소한 일이다. 혹시 내가 그 작은 일에 그 이상의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본다. 아이들이 모든 시간에 뛰는 것도 아니다. 위층에 주의를 주었건만 모른 척 한다면 그런 인간 종류를 만난 것에 대해서 내가 어찌 할 수 있겠는가? 그저 내가 살아가는 과정 중에서 만날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의 하나에 불과하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세(人間世)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실행할 수 없다. 위층에서 뛰는 소리가 들려오면 또 다시 폭발한다. 만약 이렇다면 나는 전체적 전망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어떤 누가 전체적 전망을 갖고 있다면 그는 그의 행동을 통해 그것을 보여준다. 작은 일이 일어났을 때 모두 호들갑을 떨고 과잉적 감정을 보여주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무심(無心)하게 대한다. 어찌 무심할 수 있는가? 그것은 호들갑을 떨 만큼의 가치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 기나긴 인생 속에서, 비록 내가 일찍 죽는 경우가 생긴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저 지나가는 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높은 곳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 다 보라. 모두가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아래에서는 나는 하얀 피부, 너는 노란 피부, 그는 검은 피부를 가졌다고 차별한다. 그것이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단 말인가? 게다가 나는 인간, 그것은 개라고 차별한다. 그러나 그것이 뭐 그렇게 중요한가? 중요하다고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이유는 그것이 성립하는 영역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영역 너머로 확장한다. 피부색이나 우리 인간의 외적 형체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인간이고 그것이 개라는 것도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두 한 점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점들은 자기 나름의 특성을 갖고 있다. 그 자기 나름의 특성에 참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들이다. 인간은 도덕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 도덕이 순전히 자기들이 정한 규정이다. 인간은 인간다워야 한다. 그런데 그 기준이 순전히 자기들의 정한 기준이다. 그런 임의성과 자의성을 벗어나라. 혹은 그 임의성과 자의성을 언제나 자각하라.
어떤 의미에서 대지(大知)는 지식의 특정한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기껏해야 그것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런 태도에 따라 자기 삶을 사는 자가 지인(至仁)일 것이다. 모든 인간이 유가가 바라듯이 도덕적이면 좋겠지만, 그러나 인간들에는 그렇지 않은 존재들이 있다. 어떻게 하겠는가? 그들 스스로 깨우쳐 인간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정직하게 노력하는 모든 인간들이 다 잘 살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 우리 삶이다. 나는 아직 이런 장자의 태도를 어떻게 수용할지 판단하지 못하고 있지만, 김형효는 이런 태도가 유학에서 발견되는 유위와 당위를 강조하는 것보다 더 원숙하다고 본다. 즉 세상을 개혁하고자 했던 유학이나 나아가 마르크스의 철학조차도 이 어쩔 수 없는 장애, 즉 우리 인간의 이념과 소망을 초월하는 것,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본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전체적 전망이 서있다면 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세 따위를 훌쩍 초월할 수 있는 그런 존재라면 모든 것에 대한 처방을 갖고 있을 것이지만, 나는 이런 존재의 가능성이란 불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그 전체적 전망이 우리에게 주는 의의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가진 임의적 한계를 인식하면서 오히려 진정한 한계를 보여주는 방책이라고 생각한다. 공자의 아름다운 이념이 실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해도, 공자 자신 그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대해서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않는가? 이런 한계까지 초월, 초탈할 수 있는 존재는 진짜 장자가 말하는 대붕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서 넓고 길게 생각함으로써 그런 대붕의 위치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 그것이 제아무리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지 않는 것, 동시에 필요 이하로 폄하하지 않는 것, 오히려 이것이 우리에게 진정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내 삶의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출처] 전체적 전망의 규제적 기능|작성자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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